본문 바로가기

감상/대중문화

영화 고지전 감상 : 새로운 형태의 한국 전쟁 영화

 


개인적으로 참 재밌게 본 영화였습니다. 올해에 본 영화들 중 가장 돈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라 해도 좋을 정도로.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포스터에 떡하니 붙어 있는 '휴먼대작'이란 문구 때문에 신파극을 예상하시는 분들이 꽤 되시는 것 같은데, 고지전은 좋은 의미에서 그런 기대를 배신하는 영화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래에 나온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동막골' 이나 '포화 속으로' 같은 영화와 분명 차별화된 관점과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하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무차별적인 공산당 척출을 반대하다 좌천되어,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동부전선으로 중대장의 의문사와 혹시나 있을지 모를 내통자를 조사하러 가게 된 방첩대의 장교 신하균 (동막골에서 짠하게 전사하시더니 언제 또 후방군의 장교가 된 건지.^^;) 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친일파들을 그렇게 청산하지 않았으면서, 빨갱이와 연관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잡아들입니까?' 란 신하균의 대사에서 우린 그가 그 시대에선 그나마 나름 균형잡힌 시점과 의식을 가진 인물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몇몇 이들은 이 부분에서 영화의 성향에 대한 의심, '설마 이 영화도 우리 민족끼리 손에 손 잡고 하는 그런 영화인가?' 란 생각을 미리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이념과 민족은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는 문제입니다. 그럼 이 대사는 뭐하러 집어 넣은 걸까요? 이 대사는 신하균을 관객과 링크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하균의 이 대사는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흔히 가지는 의식 수준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죠. 즉 영화 초반의 신하균은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현대의 우리, 관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몇몇 시점을 제외하고는 (처음엔 아무 것도 몰랐던) 신하균의 시점을 따라가는데, 덕분에 관객은 무리 없이 고지전의 세계관에 빠져듭니다.

일주일에 몇 번 꼴로 주인이 바뀌는 애록 고지가 있는 동부 전선에 도착한 신하균은, 전쟁 초에서 헤어진 친구이자 부하 병사였던 고수를 만나게 됩니다. 이 헤어졌다 다시 만난 친구는 전쟁의 베테랑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속칭 악어 중대의 리더가 되어 있었죠. 계급도 무려 이등병에서 중위가 되어 있었고. 이 애록고지는 그야말로 격전지 중에 격전지라 할 수 있는 환경이고, 전쟁초부터 살아남은 악어중대의 인물들은 전쟁의 베테랑 중의 베타랑들이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제 3자라 할 수 있는 신하균 (=관객) 의 시점에서 바라 본 애록고지의 환경과 악어중대 군상들의 모습, 그리고 그 신하균이 서서히 그들 속에 섞이게 되는 과정이 바로 영화 고지전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중대장의 의문사는? 그건 그야말로 맥거핀입니다. 별 다른 문제가 못 됩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대략적인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지 구체적인 진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은 스릴러적 구조를 기대했던 분이라면 조금 실망하시겠지만......^^;

전쟁이 일상화된 애록고지는 관객들에게 매우 흥미로운 세계관입니다. 애록고지를 둘러싼 국방군과 인민군의 병사들은 모두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전쟁이 그들의 일상이 되어 버렸을 뿐이죠. 서로 전쟁을 하면서 생겨난 국방군과 인민군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그들 모두가 단지 평범하면서도 선량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관객들은 알 수 있습니다. 관객들에게 우선적으로 이 사실을 주지시키고 나서, 영화는 전쟁의 비참한 단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합니다. 전우의 죽음,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의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선택과 책임의 문제, 인간성의 상실, 교류했던 적과의 대치 등등 전쟁 영화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전쟁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악어 중대원들의 과거가 밝혀지고 관객들은 평범한 그들이 전쟁이란 현실 속에서 얼마나 비참한 경험을 했고 고통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는지 알게 됩니다. 주지해야 할 점은 이러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감정선을 잡거나, 캐릭터들이 극단적으로 폭주하지는 않습니다. 힘이 들어가 있는 장면은 나름 힘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마일드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악어 중대의 인원들은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고통을 여실 없이 겪으면서도 기존의 한국 전쟁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과는 약간 다른 담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망가져 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친절하게 나온 편입니다만, 이를 오버적인 연출로 관객들에게 몰입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오히려 관객들이 더 평범한 사람들인 영화 속 캐릭터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라고 봅니다. 감독의 전작 '의형제' 에서부터 개인적으로 느낀 건데, 설정 자체는 좀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데 관객들이 이를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이유는 감독의 세련된 ? (뭐라 적당히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연출과 캐릭터 다루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고지전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겪은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토록 점령하려고 노력했던 고지가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채로 휴전이 결정되었어도, 아쉬움을 보이지 않고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휴전이 결정된 순간 대치를 풀고 서로 씩 웃으며 배웅해 주는 국방군과 인민군의 모습은 그들의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 최후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전쟁에서 휴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들었지만, 실제로 영화 속에서 이런 전개가 되는 걸 보니 탄식이 절로 흘러 나오더군요.) 영화는 마지막 순간 전쟁을 일으키는 이념이란 것이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지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나 이상을 갖다 붙여도 사람 그 자체를 지옥으로 빠뜨리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이고 비참한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말이죠. 결국 고지전은 전쟁영화이지만 그 궁극적인 주제는 바로 반전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전쟁을 다루면서도, 민족이나 이념의 코드를 꺼내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다가갔다는 점만 하더라도 고지전이란 영화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덧붙이자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보다는 전쟁의 참혹함을 여실 없이 보여줌으로써 휴머니티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는 데에 점수를 더 주고 싶구요. 휴먼대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고지전은 좋은 휴머니즘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