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트]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미시시피 강이 만드는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 최남단 삼각주 근방 지역이다. 이곳은 시에라 어드벤처 게임인 [장군의 유산]이나 [가브리엘 나이트 1]에서 볼수 있듯이 끈적한 늪지와 흑인들의 크레욜 문화와 프랑스 문화, 블루스와 재즈가 섞여있으며 부두교로 대표되는 주술적인 성향도 강한 곳이다. [비스트]가 길어올리는 감수성은 그 특유의 분위기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루시 알리바의 1인극 희곡을 원작으로 한 (알리바는 감독인 벤 제틀린의 친구이며 감독과 함께 각색을 담당하기도 했다.) [비스트]는 (원작을 접하진 못했지만) 1인극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거의 제틀린과 알리바가 전부 영화로 다시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도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이나 공간에서 사건을 꾸려가는 방법, 연기자의 동선에서는 희곡/연극 장르의 영향력이 조금씩 느껴지긴 한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세계의 끝에 있는 주점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의 동선이나 연기 패턴은 어떤 실제적인 행동이라기 보다는 고전적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받쳐주는 안무에 가깝다. 16mm 필름에 선굵게 찍힌 다큐멘터리적인 질감에 섞이는 이런 비사실적인 터치들은 카트리나 이후 루이지애나 주 하층민들의 어려운 '현실'과 폐허가 된 강렬한 자연 풍광이 주도하는 자연의 '판타스틱' 사이에 있는 경계를 허물고 있다.
자연히 그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도 판타지-정확히는 마술적 사실주의-적이다. 흑인 소녀 허쉬파피와 아버지 윙키, 우주의 균형이 깨지면 찾아온다는 식인야수 오록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중심 드라마는 의외로 일본 서브컬처에서 볼 수 있었던 '너와 나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세계의 질서와 균형'를 극의 원동력으로 삼는 '세카이계'하고 유사한 점이 많다. 허쉬파피는 깨진 관계를 복원하고 오록스를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수복하는 신화적인 여정을 수행하고 마침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장해나간다. 물론 테렌스 맬릭의 자연 풍광에 녹아드는 신화적인 인간 관계, 우화와 동화적인 판타지로 인간 관계를 보여줬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마술적 사실주의도 빠지면 안 되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비스트]가 나레이션을 통해 전개하는 철학들은 치밀한 사유라긴 보다는 보편적인 잠언에 가깝다. 감성적이고 보편적이라고 할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카이 계 작품들처럼 [비스트]의 철학들은 종종 순진하고 투박한 사유들을 여과없이 내보내기도 한다. 지적인 깊이보다는 감성적인 깊이가 중요시 되는 영화라고 할까.
하지만 [비스트]는 평범한 세카이 계 작품들과 달리 그런 순진하고 투박한 철학들을 살려줄 예술적인 에너지로 가득하다. 우선 [비스트]는 배경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 사회적인 상황을 꿰뚫어 보고 신화에 녹여내는데 성공했다. 허쉬파피의 모험은 단순히 개인적인 모험에 그치지 않는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폐허가 된 땅에서 짐짝 취급 받는 루이지애나 주 하층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에너지를 살려내기 위한 신화적인 모험인것이다.
영화는 이런 하층민들의 에너지을 물기라는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태풍이 와도 '젖은' 땅을 떠나지 않고 남아 끝없이 싸우고 투쟁하며 살아가며 '마른' 땅에 강제로 끌려와도 꿋꿋이 젖은 땅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현실에 좌절하고 병들어가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서 간다. 이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생선과 게, 닭고기를 원초적으로 잡고 뜯어먹는 행위, 댐을 파괴하거나 피난민 보호 센터에서 벌이는 난동 같은 엉뚱하고도 순진한 계획 같은 행동들을 통해 뿜어져 나오고 있으며 '오록스'를 통해 제틀린 감독은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인들이 잊고 있었거나 일부러 버렸던 원초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일깨우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인 벤 제틀린이 (어쩔 수 없는) 외부인인지라 (그는 동부 출신의 러시아계 지식인이다. 부모님이 민속학자에 루이지애나 주 문화가 매료되서 정착했다고.) 드러나는 한계도 종종 있다. 그 중 하나가 인종 묘사가 거세된 부분인데-이 영화에서 백인이나 흑인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냥 다 같이 하층민 이웃이다.-솔직히 외부인 입장으로는 판단하기 힘들었다. 다만 판타지라고 쳐도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주의를 생각해보면 말해야할 것은 빼먹은거 아닌가라는 느낌이 있다. 첫 영화인지라 서사와 관계없이 삽입되는 컷들처럼 조금 거친 면모도 있다.
[비스트]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다. 삶과 죽음을 긍정하고 우주의 진리를 향해 나가는 야수같은 에너지를 가진 이 영화의 판타지엔 마음을 정화시키는 신묘한 힘이 있다. 단점이 있어도 사랑하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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